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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누구 마누란가 혔을껴-

by 고향사람 2014. 2. 11.

엊그제 서울에 있는 마눌과 아들을 보고 왔습니다.

아들은 공익근무중이고

마눌은 필리핀서 들어 와 잠시 서울에 머물고 있는 터였습니다.

 

식구들과 하룻밤 함께 하고 이튿날 아침

고향집으로 내려가기 위해 전철 역으로 향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다급하게 부르는 겁니다.

되돌아 보니 마눌이었습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쌀자루 만큼 헐렁한 홈웨어.

거기다다 큼지막한 아들놈 운동화를 질질 끌다 시피하며서 뛰어 오는 마눌.

정말 볼만?했습니다.

 

서울에서도 가장 번잡한 도로인 동대문 대로변을 뛰면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마눌을 본 시민들이라면

-저거 남푠은 뭔 하는 놈이지 싶었을 겁니다.

나 역시 상상치 못한 상황에 접하면서

그만 ‘얼음’이 돼 그 자리에서 꼼짝 못했으니까 말입니다.

 

-여봇 왜 전활 안받어. 이거 놓고 갔잖아.

숨도 제대로 못 쉬겠다는 표정과 함께 내 손에 건넨 것은

바로 돋보기 안경이었습니다.

이 안경 없이는 차 시간표도 못 보는 내 사정을 아는 마눌인지라

정말 목숨 걸고 뛰어 온 겁니다.

옷 차림, 머리상태 다 무시하고 말입니다.

 

내게 안경을 건네고 나서야 종아리 밑으로 나온 내복을 겉어 올리고

구겨 신고 달려온 운동화 뒷굽을 펴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이꼴이 뭐야’ 하면서

숙소로 되돌아 갈 길을 걱정하는 마눌을 보자니 짜증과 연민이 교차됐습니다.

 

돋보기 하나 때문에 이 짓?을 하고 나왔나 싶었다가도

그거 없으면 눈뜬 장님 처럼 다닐 남편을 생각해

창피고 뭐고 가리지 않고 뛰쳐 나온 마눌의 마음을 헤아리니

마음이 짠해졌습니다.

나 같았으면 절대 안하지, 아니 못하지-

 

남편을 위해서 자신의 체면을 포기하고

서울 한 복판을 광녀(狂女)처럼 달려 전해 준 싸구려 돋보기 안경.

이번 발렌타인 데이의 가장 큰 선물로 여겨 집니다.

 

내 속에서도 마눌과 같은 용기가 샘 솟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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