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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문 뒤에 숨은 아이야-

by 고향사람 2013. 5. 27.

지난 주말 클라베 앞 바다에 있는 라피티간 섬으로

짧은 여행을 다녀 왔다는 글을 올리고 나서

카메라 속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유독 내 뒤를 졸졸 따라 다니던 여아의 얼굴이 나옵니다.

 

예닐곱살 정도 되는 아이였는데-

다른 아이들보다 더 피부가 검고 잘 씻지도 않은 모양새지만

웃을 때 마다 보조개가 깊게 패이는 수줍음 많은 아이였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먼저 아는체를 하자

녀석은 이모?의 치맛단으로 얼굴을 감추기 바쁘다가

내가 한 눈을 파는 사이 얼른 집안으로 도망가더니

기회가 날 때마다 문 틈으로만 나를 엿보던? 정말 수줍음 타는 녀석이었습니다.

 

과자와 사탕을 내 밀고-

하다 못해 배낭에 들어 있던 아이패드를 꺼내 아이들이 좋아하는

‘흉내 잘 내는 고양이 프로그램’을 가동시켜놔도 눈만 내 놓고 훔쳐 볼 뿐

절대 밖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아이패드를 통째로 건네줘도 숨기만 하던 녀석이

내가 섬을 한 바퀴 돌며 구경한다고 나서자 내 그림자 서너개 거리에서

살금살금 따라 나섭니다.

 

내가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면 신기한듯 다가 섰다가도

제 얼굴에 초점을 맞추면 얼른 나무 뒤로 도망가 숨습니다.

동행한 매니저도 저런 아이 처음 봤다고 할 만큼 숙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그 아이가 살고 있는 집 앞 미니 그늘막에 와

한숨을 돌리자니 오랫동안 참았던 쉬-가 생각나 화장실을 찾자

놀랍게도 녀석이 내 앞 길을 인도해 주는 겁니다.

 

집 뒤를 돌아가니 바닷가에 화장실이 있었습니다.

엉성한 천막으로 둘러친 화장실이었지만 시원한 바닷물을 보면서 쉬-를 하니

그 양?이 평소의 두 배는 되는 것 같았습니다.

필리핀서 가장 멋진 화장실을 이용하는 기분이 들었으니 말입니다.

문제는 쉬-를 하고 나서 물을 내려야 하는데 빈 양동이 밖에 보이지 않는 겁니다.

이를 어쩐다- 하면서 그냥 나오자

내 뒤에 서 있던 여아가 양동이를 꺼내 들더니 바닷물로 뛰어 드는 겁니다.

그리고는 어렵게 물 한동이를 떠와 변기에 쏟아 붓습니다.

바닷물로 들어 갈 때까지도 왜 그러는지 이유를 몰랐다가-

내 용변 뒤처리를 해 주는 여아를 보고 나서야 녀석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려 네 마음 내 안다.

내가 준 과자도 내 앞에서는 먹지 못할 정도로 수줍움이 많았지만

제 딴엔 뭔가로라도 보답하고 픈 마음이 있었는데 마침 화장실을 찾는 나를

안내하고 그 뒤처리까지 해주는 것으로 나름 속 깊은 마음을 표현한 것 같아섭니다.

 

낯선 이방인의 갑작스런 방문에-

아마 태어나서 처음으로 직접 목격한 이방인인지라 괴리감도 컷겠지만

내가 섬을 빠져 나오는 배를 탈 때 쯤에는

어느새 내 색시마냥 옆에 붙어 따라 다니고 있었습니다.

같이 사진을 짝을 때마다 미소도 보태주고 말입니다.

 

나 역시 섬 여행을 한답시고 떠난 길이었지만

지금 그 섬을 생각하면 이름도 모르는 이 여아 얼굴만 떠 오릅니다.

(인터넷이 느려 사진을 올리지 못하는 게 참 아쉽네요^^ )

-아이야. 건강하게 잘 자라길 기도한다.

지금도 문 뒤에 숨기만 하던 이 아이를 생각하면 코 끝이 찡해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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