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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이야기

함부로 ‘담’ 넘지마라- ‘총’ 맞는다

by 고향사람 2008. 8. 4.
내 어렸을 적, 이쁜이로 소문났던 동네 한 누나는 ‘뻐꾸기 우는 철’만 되면 야반도주(flight by night)를 했답니다. 그러다가 아비한테 걸리면 머리 삭발 당하고-. 그래도 이듬해 또 보따리를 싸고. 그러다가 지금까지 그 행방이 묘연하답니다.


핏빛 진달래 꽃물이 그 누나 가슴을 물들여서 그런다는 이도 있었고, 봄바람 울렁증을 이기지 못해서 그랬다는 이도 있었지만 어린 내 눈에는 여전히 이쁜 누나로만 보였었습니다. 머리가 박박 깎였을 때만 빼고 말입니다. 어젯밤에는 토담 넘어 달아 난 그 누나가 생각났었습니다. 오밤중에 담 넘어 들어 온 아들놈 때문입니다.


퀘존에 있는 유피(UP)대학에 다니는 아들놈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 년에 한 두 번씩 월담을 합니다. 이쁜이 누나처럼 담 넘어 도망가는 게 아니고, 이놈은 거꾸로 담 넘어 들어옵니다. 늦는 이유도 가지각색입니다. 한국에 들어가는 친구 송별회에서부터 과(科) 모임, 혹은 여친과 쪽난놈 위로하느라고 쬐꼼 늦었다는 겁니다. 새벽 2시인데 말입니다. 이쯤 되면 우리집은 모든 문을 잠가 버립니다. 그러니까 아들놈이 담을 넘어 들어오는 겁니다.


어젯밤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분명 저녁 먹고 차나 한 잔 하고 오겠다는 녀석이, 밤 12시를 넘기자 더 기다릴 것도 없이 모든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그리고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보니까 제 방에서 쿨쿨 잘도 자고 있었습니다. 마누라 고함 소리가 들립니다.

‘얌 시키야-. 너 어떻게 들어 왔어-’

부시시한 몰골로 일어 난 녀석이 대답합니다.

‘제발 문 좀 잠그지 마세요. 담 넘고 베란다 타고 들어오기가 쉬운 줄 아세요-’

‘그러니까 일찍 들어오면 되쟎아. 너 이번이 마지막인줄 알아-’


우리 집에서 ‘마지막은 없는 단어’나 마찬가지입니다. 두어 달 후면 똑 같은 멘트가 또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젊은 청춘 때 흰서리 맞고 다니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이 대목에서 ‘아들놈이 확실한 내 아들’임을 실감합니다. 피를 제대로 물려받은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빌리지 내 가드들은 인상도 더럽지만, 가끔은 휴대하고 다니는 총을 쏜다는 소문도 들은 터라, 이번엔 내가 아들놈한테 점잖게 충고했습니다.


‘아들아. 함부로 담 넘지 마라. 그러다가 총 맞는다’


그나저나 내 어릴적 담 넘어 도망간 그 이쁜 누이는 잘 살고 있을까.

진달래꽃 없는 필리피노들은 가슴에 붉은 물 들 일은 없을까.

나는 왜 한 번도 담어 도망가지 않고 여지껏 이 여편네하고만 살까.

 

지난밤은 내가 한 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그나저나’ 하느라고 말입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