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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난 묘지 이야기

별난 이야기 책 '서문'- 책을 왜 내는가

by 고향사람 2006. 5. 21.

 

 

책을 왜 내는가


기실 나는 원혼이나 귀신, 악마 등의 존재를 믿지 않는 편이다. 

이 같은 이유는 기자생활을 오래 하면서 사실주의에 시선이 쏠려 더 고착화된 때문이 아닌가 싶다. 

덕분에 귀신 따위는 드라마 소재 정도로 인식하는 경향이 짙게 되었다. 

그런데 ‘별난 묘지’를 취재 다니면서 한 가지 ‘믿음’이 생기게 되었다. 

(亡그가者, 아니면 귀신) 나를 부르고, 때로는 이끌어 주고 있다는 막연한 확신이 든 것이다.

 

깊은 산중에서 수백 년 된 묘를 찾는다는 것은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격’일 때가 많다. 

더군다나 숲이 우거진 여름철에는 내가 찾는 묘를 지척에 두고도 

한나절 이상을 헤매는 경우가 허다하고, 

눈 쌓인 한겨울에는 낮은 봉분을 구별해 내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묘지를 찾아 나가면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이끌어 준다.

 

약도도 없이 묻고 물어 간 초행길이지만, 일단 산속이나 묘지 주변에 이르게 되면 

직감대로 발길을 떼면 그만이다. 갈래 길에서도 멈칫거린 적이 별로 없다. 

그리고는 ‘여기 어디쯤일 텐데’ 하고 돌아보면 영낙없이 거기에 내가 찾는 묘가 보인다. 

목적지에서 사진을 찍고 주변 스케치를 마친 다음 되돌아 나오다 보면, 

시간이 늦어져 차도 끊기고 배편도 없을 때가 많다. 

수십 리 길을 걸어야 할 판이다. 그러나 나는 크게 걱정을 않는다. 

강이나 바닷가에서는 야간 낚싯배가 지나가고, 촌길에는 승용차가 나타난다. 

꼭 나를 태워 주기 위해 기다렸다는 듯이. 

때로는 민가에 들어가서 하룻밤 유숙을 청하면 오래 된 벗처럼 친절하게 재워 준다. 

휴가철 민박 경험과 전혀 다른 분위기라면 믿어 줄까.

 

절친한 친구에게 이 같은 사실을 말하자 

‘먼 곳에서 자신의 유택을 찾아온 귀한 손님이기에, 

그 주인이 당신을 도와주는 것 아니냐’며 나름대로 진단을 내려 준다. 


신이 아닌 이상, 누구든지 죽음을 피해 갈 수는 없다. 

불로장생을 꿈꾸었던 진시황의 욕심도, 

절세 미인으로 알려진 클레오파트라나 양귀비의 아름다움도 죽음 앞에서는 큰 힘이 되지 못했다.

우리 민요 〈상여 소리서는 ‘북망산이 멀다더니 문턱 밖이 북망일세……. 

일가 친척 많다 한들 어느 누가 대신 가며, 

친구 자식 많다 한들 어느 누가 대신 가리’라는 가사가 나온다. 

이처럼 어느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게 바로 죽음인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여전히 1백 년 안팎의 짧은 인생에도 불구, 

천년 만년을 생각하며 스스로가 생을 더 짧게 하고 있다. 

잠시 머물다 가면 그뿐인데, 명예와 부귀를 좇다가 혹은 증오와 편견을 일삼다가 

정작 죽음 앞에서는 가슴을 치며 후회하면서 쓸쓸히 사라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는 이런 사람들에게 수많은 사연을 가슴속에 안고 

지하 세계로 내려간 이들의 무덤을 찾아가 보도록 권하고 싶다. 

그래서 부귀와 명예가 얼마나 부질없고, 

거짓과 질투가 무슨 소용이 있었나를 깨닫게 하고 싶다. 

나는 무명초와 같이 살다 간 사형수들의 무덤 앞에 설 때마다 느끼는 것이 많다. 

한순간 잘못된 생각으로 평생 씻지 못할 죄를 짓고, 

저 세상에서도 마음 편히 잠들지 못했을 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세상에 아름다운 죽음은 없다. 또 슬픈 죽음도 없다. 

살아 있는 이들의 눈에 그렇게 비칠 뿐이다. 

평소 생사일여(生死一如; 삶과 죽음이 하나다)요 

생사불이(生死不二;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다)라고 큰소리쳤던 사람이,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는 까닭은 삶과 죽음 사이의 깊은 골을 알기 때문이리라. 

이런 이유로, 죽음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이론이 맞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정말 그럴까. 

그러나 실상은 ‘아니다’라는 쪽으로 기운다. 

화려한 장례식과 호사스런 무덤을 지켜본 사람은, 

죽은 뒤에도 계속되는 빈부 격차를 실감할 뿐이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유사 이래 이 시처럼 살다 간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러나 한줌 흙으로 돌아가기 전, 무거운 짐을 덜어 놓으려는 노력은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무덤(묘)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택한 것도 어쩌면 

내 인생을 반추해 보기 위한 하나의 통과 의례였는지도 모른다. 

값비싼 비석에, 혹은 화려한 비단천에 미사여구로 남긴 유언이면 무엇하겠는가. 

살아 있음에 감사할 줄 알고, 

죽어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길 수 있는 인생살이가 보람되지 않겠는가. 

별난 무덤을 찾아다닌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죄인으로 살다 간 인생들의 흔적에서부터, 

적군이란 이름으로 혹은 내시와 궁녀로써 한많은 삶을 살아야 했던 과거의 흔적을 되짚어 보면서 

‘인생의 허무’를 곱씹어 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동물의 무덤을 만들어 줄 줄 아는 인간들의 마음 씀씀이를 조명해 보기도 했고, 

고인돌에서는 문화를 발견하기도 했다. 

미래의 장묘문화가 될지도 모르는 사이버 묘지는 

아직 정서적으로 다가서지 않는 것을 느끼면서 나 역시 구세대임을 깨닫는 계기도 됐다. 

일부 종교인의 묘소를 등장시키고 방랑 시인의 유택을 살펴본 것도 

인간 세상의 한 단면을 보여주기 위해 고심한 흔적으로 여겨 줬으면 한다. 


묘지 취재를 하면서 반복되는 사건(?) 중 하나가 망자들의 유택에 다다르면 

부슬비가 자주 내린다는 것이었다. 

우연이라기보다 필연이라는 단어가 걸맞을 정도로, 

사연 많은 무덤에 갈 때마다 비가 내리는 것이었다. 

갈수기인 이른 봄이나 늦가을에도 비가 내리고, 

여름은 여름대로 비가 오는 까닭에 묘지 취재를 갈 때면 

으레 우산을 챙겨야 하는 게 습관이 되다시피 했다. 

 

1997년 늦은 봄날, 대구 비슬산에 있는 사형수 묘역을 찾았을 때도 비가 내렸다. 

한 평도 차지 못한 무덤이 풍진 세월을 견디다 못해 평토화돼 

그 흔적을 구분하기도 쉽지 않은 터였다. 

조심한다는 것이 그만 고인이 누워 있는 유택에 구둣발자국을 내버리고 말았다. 

비에 젖은 땅인지라 구둣발은 무덤 한가운데에 큰 흉터를 내버렸다. 

나는 송구한 마음으로 부랴부랴 그 흔적을 지웠지만 

영혼에 대한 미안함까지는 다 지울 수가 없었다. 

 

이날 이후 나는 묘지를 찾을 때마다 황토로 물든 

구두굽과 바짓가랑이의 흙을 애써 털어 내지 않는 버릇이 생기게 됐다. 

지하 세계에서 극락 왕생하고픈 영혼들의 흔적이라고 생각하니 

흙알갱이 하나라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중압감이 든 것이다. 

빗속에서 찾는 무덤. 더군다나 어둠이라도 내려앉는 저녁 나절이면 

별 생각이 다 따라다니기도 한다. ‘전설의 고향’ 속에 빠져들 정도로 말이다.


글을 쓰는 이유가 길어졌다. 

이 책을 읽는 독자님과 소재가 됐던 영혼들에게 감사한다. 

또 이 책이 나오기까지 애써 주신 주변 사람들에게도 감사드린다. 

지금 이 시간에도 창 밖에는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는데, 

내가 아는 영혼이 축복의 노래라도 불러 주고 있는지 모르겠다.

 

                                                                        2001년 1

                                                                      삼청동 골방에서  지은이 김 석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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