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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 & 동감

나이키

by 고향사람 2016. 11. 6.

신발 이상의 것… 우린 '스포츠 드라마'를 만든다

  • 비버튼(미국)=김남희 기자   

    Weekly B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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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ver Story] 연 매출 37조원, 52년 역사의 세계 최대 스포츠용품 회사 나이키… 필 나이트 창업자

    1975년 나이키는 거래하던 은행에서 버림받았다. 당장 일본 무역회사에 100만달러를 갚아야 했지만, 은행이 돈을 지급할 계좌를 동결했다. 더는 이 조그만 신발 회사의 무모한 사업에 얽혀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나이키가 발행한 수표는 부도가 났고, 회사는 파산 위기를 맞았다. 나이키 공동 창업자인 필 나이트(Knight)는 일본 무역회사를 찾아갔다. 그는 담당자에게 지금 당장은 돈을 갚을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100만달러를 더 빌려 달라고 했다. 회사와 그의 인생을 건 도박이었다. 예상외로 일본 회사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위기에서 벗어난 나이키는 이후 연간 매출이 324억달러(약 37조원·2015년)에 달하는 세계 최대 스포츠용품 회사로 성장했다. 나이트는 당시를 돌아보며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나이키 이미지
    나이키

    미국 서부 오리건주 포틀랜드 출신인 나이트는 오리건대 재학 시절 달리기 선수였다. 그러나 가장 빠른 선수는 아니었다. 그는 달리기를 단념하고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에 진학해 기업가를 꿈꿨다. 그는 졸업 후 떠난 세계여행 도중 일본에 들러 아식스 전신인 오니쓰카의 타이거 운동화를 수입해 미국에서 판매하는 계약을 따냈다. 1964년 그는 대학 시절 달리기 코치였던 빌 바우어먼(Bowerman·1911~1999)과 함께 나이키의 전신인 블루리본스포츠를 설립했다. 나이트가 51%, 바우어먼이 49%의 지분을 가졌다.

    타이거 운동화가 값이 싸면서도 품질이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회사는 점차 커갔다. 바우어먼은 미국 육상팀을 이끌고 올림픽에 코치로 출전해 미국에 금메달을 안기면서 '전설의 육상 코치'로 명성을 쌓았다. 나이트는 회계사와 대학 조교수 일을 그만두고 회사에 전념하기로 했다. 그러나 일본 오니쓰카와 관계가 틀어지고 법정 싸움까지 벌이게 되면서 회사는 타격을 받았다. 나이트는 결국 운동화를 자체적으로 만들어 팔기로 했다. 우선 그리스 신화 속 승리의 여신 '니케'의 이름을 따 회사 이름을 나이키로 바꿨다. 누군가 곁을 지나갈 때 '휙' 하고 나는 바람 소리를 표현한 로고도 이때 탄생했다. 나이키는 누구나 로고만 보고도 회사 이름을 떠올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브랜드 중 하나다. 올해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브랜드' 순위에서 18위에 올랐다. 경쟁사인 독일 아디다스는 90위로 나이키와 큰 격차가 난다.

    필 나이트
    블룸버그
    현재 나이키에서 나이트(78·사진)의 직함은 명예회장 겸 이사회 명예의장이다. 그는 2004년까지 40년간 최고경영자(CEO)로 회사를 경영했다. 2004년 11월 나이키 CEO직에서 물러난 후엔 이사회 의장을 맡았다. 올해 6월에는 이사회 의장직에서도 내려왔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매일 회사로 출근하고, 명예의장으로서 이사회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그는 올해 회고록 '슈독(원제 Shoe Dog)'을 출간했다. 이 책은 그가 나이키를 세우기 전인 1962년부터 회사를 주식시장에 상장한 1980년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슈독은 일생을 신발에 바친 사람을 뜻한다.

    9월 중순 미 오리건주 비버튼에 있는 나이키 본사를 찾았다. 야외 테이블에서 직원들이 손에 운동화를 들고 토론하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이키 본사 건물들 일부는 운동선수 이름으로 불린다. 이 중 나이트 명예회장의 집무실은 미 여자 축구선수 미아 햄의 이름을 붙인 '미아 햄 빌딩' 3층에 있었다. 그는 한 손에 콜라 캔을 들고 들어왔다. 트레이드 마크인 검은색 티셔츠와 재킷을 입고 검은색 나이키 신발을 신고 있었다. 그는 이 옷차림을 자신의 '유니폼'이라고 했다.

    그는 "맨손으로 사업을 시작하고 보니 주변에서는 끊임없이 내 회사의 성공 가능성을 깎아내렸다"면서 50년 전을 떠올리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당시 아디다스와 푸마 등 독일 회사들이 운동화 시장을 선도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미국에서 신발 만드는 것은 가당찮다고 했다. 실패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았지만, 낙관적인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나에겐 회사를 키우는 일이 가장 재미있었다. 우리에겐 꿈이 있었고 성공할 것이라 믿었다. 어려움이 생겨도 극복할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이 있었다. 성공에는 집요함이 필요하다."

    ―나이키를 운동화 수입상사에서 세계 최대 스포츠용품 기업으로 성장시킨 비결은.

    "나이키는 신발 회사 그 이상이다. 전 세계 운동선수들에게 영감과 혁신을 가져다주는 회사가 되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다. 그게 우리의 정체성이고 우리가 해온 것이다. 사업 초기 시절 자금이 없었고 기술도 없었다. 희망 외엔 가진 게 없었다. 하지만 나는 항상 최고가 되고 싶었다. 최고가 되기 위해 굉장히 노력했다. 오리건대 출신으로 1970년대 미국 최고의 중장거리 달리기 선수로 명성을 떨친 스티브 프리폰테인은 '무언가에 최고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은 재능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모두 이 말에 공감하고 끊임없이 움직였다. 우리 제품과 브랜드에 헌신적인 소비자들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가끔 나이키나 애플 등의 브랜드를 종교에 비유하는 경영학자들도 있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회사는 단지 스포츠의 일부다. 스포츠는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전 세계 운동선수가 경기장에서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우리의 제품과 위대한 운동선수, 드라마가 결합할 때 다양한 감정이 생겨나고 소비자가 열광하는 것이다."

    나이트 명예회장의 대학 시절 달리기 코치이자 창업 파트너인 바우어먼은 1950년대부터 선수들이 신는 운동화를 직접 손봤다. 신발 제조업체에 개선 방안을 적어 보내기도 했지만, 아무도 그의 제안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나이트는 바우어먼과 회사를 설립한 후 바우어먼이 제안한 운동화를 직접 만들기로 했다. 아킬레스건(腱)에 부담이 덜 가도록 스펀지 고무로 된 중간창을 넣어 만든 운동화는 1967년 오니쓰카에서 ‘타이거 코르테즈’라는 이름으로 출시됐다. 오니쓰카와의 결별 후에도 코르테즈 제품은 여전히 나이키의 베스트셀링 운동화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바우어먼은 금속 스파이크 없이 지면 마찰력을 높일 수 있는 운동화도 개발했다. 집에서 쓰던 와플 굽는 기계를 이용해 실험을 거듭한 끝에 1974년 와플 모양 밑창을 붙인 ‘와플 트레이너’ 운동화를 선보였다. 나이트 명예회장은 “와플 트레이너 운동화는 탄력성과 충격 완화 기능이 뛰어나 운동선수와 취미로 달리기를 하는 일반인에게 모두 환영받았다”면서 “나이키가 미국의 대표적인 신발 제조업체로 올라서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제품 혁신의 핵심은 뭔가.

    “운동선수가 경기에서 최고의 잠재력을 펼칠 수 있게 해줄 제품을 만들자는 목표가 혁신의 원동력이다. 좋은 제품이 없으면 기업은 생존할 수 없다. 바우어먼은 달리기 선수를 위한 운동화는 ‘가볍고 편안하고 멀리 갈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언제나 더 나은 신발을 찾고 있었다. 기술 변화는 계속 일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완벽한 신발, 완벽한 옷을 만들지 못했다. 지금도 나이키는 더 나은 신발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한다. 이게 우리의 DNA다.”

    ―연구개발 전담 조직을 언제부터 갖췄나.

    “스포츠 리서치 랩을 1980년부터 본사에 설립했다. 생체학·생리학·기계공학·물리학 등을 전공한 40여 명의 정예 과학자가 모여 운동선수의 신체 움직임, 경기 성적, 주변 환경 등에 대한 데이터를 모아 과학적으로 분석한다. 여기서 얻은 많은 양의 데이터를 새로운 지식으로 바꿔 제품 개발에 활용한다. 선수가 원하는 것을 잘 이해할수록 더 뛰어난 제품을 만들 수 있다. 선수는 테스트에 참여하고 피드백을 주면서 제품 디자인에 참여한다. 사실 나는 ‘테크 가이(기술에 밝은 사람)’가 전혀 아니다. 그렇지만 혁신의 중심에는 기술이 있다. 기술에 대한 투자가 중요하다.”

    필 나이트 / 나이키 개요
    나이키
    나이키의 정체성은 여전히 신발

    ―운동화 외에 의류, 스포츠 장비 분야로 사업 영역을 넓혔는데.

    “이젠 의류 부문도 커져 회사에 중요한 사업이 됐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나이키의 정체성이 여전히 신발에 있다고 생각한다. 신발 사업은 오리건대 달리기 경기장과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에서 탄생했다. 내가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학원에서 기업가 정신에 관한 수업을 들으면서 내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고, 성격에 맞지 않게 외국 여행을 가서 오니쓰카와 파트너 계약도 맺었다.”

    나이트 명예회장은 회사를 경영하면서 느낀 최고의 순간으로 나이키와 계약한 운동선수들이 경기에서 좋은 결과를 냈을 때를 꼽았다. 그는 “지금 생각나는 건 존 매켄로(테니스 선수)가 윔블던에서 우승했을 때, 마이클 조던(농구 선수)이 처음 NBA(미국프로농구) 챔피언십에서 이겼을 때, 세레나 윌리엄스(테니스 선수)가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불렸을 때다. 나에겐 굉장한 순간이었다”고 했다.

    ―최고의 운동선수들을 등장시키는 마케팅으로 유명하다. 회사 성장에 어떤 역할을 했나.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나는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사람들이 뭔가 잘하고 싶은 열망이 크다는 걸 알았다. 스포츠는 이런 바람이 극대화되는 분야다. 선수가 역경을 이겨내고 정상에 오르는 장면을 보며 사람들은 감정이입을 한다. 최고의 선수가 회사를 대변하는 것은 지금도 상당히 중요하다. 최고의 선수와 최고의 제품은 잘 어울린다. 아주 초기부터 마케팅에 필수적인 도구였고 효과가 있었다. 선수와의 관계는 단순한 인도스먼트(endorsement·유명인이 대가를 받고 제품이나 브랜드를 지지하는 것) 이상이다. 선수의 마음을 얻고 인간적인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마이클 조던과 함께 한 조던 브랜드는 나이키를 한 단계 도약시켰다. 현재 조던 브랜드의 판매량은 그가 선수로 활동할 때보다도 많다.”

    ―사업 초기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자금을 구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 우리는 굉장한 사업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은행이나 투자회사는 ‘일본 육상화라니, 말도 안 돼’ 이런 반응을 보였다. 특히 은행은 보수적이라 새로운 사업에 관대하지 않았다. 지금은 이런 시스템을 잘 이해하지만, 당시에는 우리가 가진 운동화 재고에 투자하지 않으려는 은행 때문에 괴로웠다. 은행은 겉모습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돈을 빌리려면 얼굴에 수염도 마음대로 기를 수 없었다. 60세가 넘어서야 턱수염을 기를 수 있었다.”

    ―회사를 경영하면서 한계를 느낀 적이 있나.

    “한계를 느낀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좌절은 많이 겪었다. 매년 매출과 이익이 늘지는 않는다. 오히려 줄어들 때도 있다. 매출이 감소하던 시기에 큰 압박을 느꼈다. 마크 파커 현 CEO도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주주를 실망시킨다는 생각 때문에 압박이 컸다. 나는 지는 것을 싫어한다. 졌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해서 스스로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준다.”

    ―경쟁심이 센 편인가.

    “나는 경쟁심이 강한 사람이다. 대학 육상선수 시절 바우어먼 코치는 나에게 경쟁을 가르쳤다. 그는 보통 수준의 성과를 내면 칭찬하지 않았다. 그에게 칭찬받으면 다른 코치에게 칭찬받을 때보다 훨씬 좋았다. 그가 칭찬했다는 것은 아주 잘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기업 CEO가 되려고 한다면, 경쟁심이 있어야 한다. ‘비즈니스는 총알 없는 전쟁이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나는 처음부터 아디다스가 싫었다. 초창기에 우리가 만든 제품 이름을 아디다스가 못 쓰게 한 적도 있다. 25년 전쯤 한 TV 프로그램에서 나를 인터뷰 할 때 리복 회장을 만날 생각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싫다고 답했다. 나는 ‘그 사람을 모르고, 좋아하지도 않고, 좋아하고 싶지도 않다’고 말했다. 경쟁이란 나에게 이런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많은 회사와 경쟁한다. 나는 한 번도 그들을 좋아한 적이 없다.”

    ―과거와 비교해 현재는 사업 환경이 많이 다른가.

    “40년간 회사를 경영했는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내 스타일을 바꿔야 했다. 나는 관리자보다는 기업가 기질이 더 강하다. 그러나 모든 직원을 이름으로 부르던 초창기와는 달리 직원이 수만 명에 이를 정도로 회사가 커진 후에는 어쩔 수 없이 관리자 역할에 익숙해져야 했다. 경영대학원과 회계법인에서 받은 교육과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됐다.

    미국은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기업에 대한 규제가 많이 생기면서 사업 환경이 다소 어려워졌다. 다행히 나이키는 이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회사 규모가 컸지만, 더 작은 회사들은 힘들 것이다. 미국은 다시 사업하기에 좋은 나라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이사회 의장직 은퇴로 회사의 공식 의사 결정에서는 빠졌다. 창업자로서 아쉽지 않나.

    “오래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다. 2년 늦게 물러나는 것보다는 2년 일찍 내려놓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회사가 변화에 준비할 시간이 생긴다. 작년에 은퇴 계획을 밝히고 파커 현 CEO에게 내 역할을 모두 넘기기까지 1년의 준비 기간이 있었다. 지금 나는 건강도 좋고 기분도 좋다. 회사를 아주 떠난 것도 아니지 않나. 파커 CEO는 1979년 신발 디자이너로 회사에 합류한 이래 늘 혁신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회사를 다음 단계로 이끌어갈 적임자다.”

    미국 오리건주 비버튼에 있는 나이키 본사에 가려면 나이키 공동 창업자 빌 바우어먼의 이름을 딴 ‘원 바우어먼 드라이브’를 통과해야 한다. 본사 곳곳에는 나이키를 거쳐간 많은 운동선수의 모습이 담긴 깃발이 걸려 있다. 필 나이트 나이키 명예회장은 “우리와 함께한 선수들이 경기에서 좋은 성과를 냈을 때가 나에겐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미국 오리건주 비버튼에 있는 나이키 본사에 가려면 나이키 공동 창업자 빌 바우어먼의 이름을 딴 ‘원 바우어먼 드라이브’를 통과해야 한다. 본사 곳곳에는 나이키를 거쳐간 많은 운동선수의 모습이 담긴 깃발이 걸려 있다. 필 나이트 나이키 명예회장은 “우리와 함께한 선수들이 경기에서 좋은 성과를 냈을 때가 나에겐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 김남희 기자
    해외 공장 착취 사건, 위기를 기회로

    ―해외 공장의 열악한 근로 환경과 노동력 착취 사건으로 위기를 맞기도 했다. 어떻게 극복했나.

    “약 20년 전이다. 당시 우리는 해외 공장 상태가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비판이 일기 시작했을 때에는 이 비난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당시 CEO로서 미숙하게 대응했다. 나는 우리가 처음 공장에 갔을 때보다 작업 환경이 많이 좋아졌다고 주장했다. 불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었다. 이 일로 회사 직원들도 상처를 받았다. 좋은 회사에서 일한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주변에서 ‘그런 회사 왜 다니니?’ 같은 비아냥이 들린 것이다. 우리는 공장 근로 환경을 개선하고 회사를 재정비하는 기회로 삼았다. 공장에서 신발 제조 때 유독가스를 많이 배출하는 접착제 대신 더 안전한 수성 접착제를 쓰도록 했다. 지금은 다른 회사들도 우리가 개발한 수성 접착제를 사용한다. 빈곤국의 어린 소녀들을 교육하는 ‘걸 이펙트(Girl Effect)’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나이트 명예회장의 순자산은 235억달러(포브스 11월 1일 기준)에 달한다. 현재 전 세계에서 32번째 부자로 꼽힌다. 그는 자선 기부 활동을 활발히 해왔다. 2013년엔 오리건 보건과학대에 암 연구를 위해 5억달러를 기부했고 올해 2월에는 스탠퍼드대에 대학원 장학금으로 4억달러를 내놨다. 지난달에는 오리건대에 과학센터 건립 비용으로 5억달러를 기부했다.

    ―자선 기부에 적극적인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할 생각이다. 무엇보다 교육과 질병 치료를 위한 재정적 지원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점점 기초과학 연구와 공공 고등교육에 대한 지원이 줄어들고 있다. 경제적 걱정이 삶의 수준을 높일 기회를 빼앗는 걸 보고만 있어선 안 된다. 암은 전 세계 모든 가정에 영향을 주는 병이다. 암 치료에 진전이 생기길 바라고 있다. 스탠퍼드대 기부는 리더십을 기르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0, 30, 50년 후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나는 학생들이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 문제를 해결하고 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란다. 재산의 일부는 나이키가 외부의 적대적 인수·합병 대상이 되지 않도록 안전장치로 떼어놨다.”

    ―주식시장 상장을 망설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인가.

    “원래 상장을 원하지 않았다. 회사 지배권을 잃는 것에 대해 걱정이 많았다. 1980년 12월에 상장하기까지 2~3년간 토론했다. 지금은 잘한 결정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당시 애플과 같은 주(週)에 상장했는데, 현재 팀 쿡 애플 CEO가 나이키 이사회의 일원이다. 나는 다른 어떤 회사보다도 애플을 존경한다.”

    ―젊은 세대는 과거 세대보다 미래를 더 비관적으로 보는 듯하다. 조언을 해준다면.

    “복잡한 세상이 됐지만, 전보다 기회는 더 많아졌다. 꿈이 있다면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계속 도전해야 한다. 기업가에 대한 사회 분위기가 10년 전과는 다르지만, 여전히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업가는 초기 어려운 시기를 이겨낼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나는 실패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다. 젊은 세대는 과거보다 교육을 많이 받고 능력도 뛰어나다. 그러나 이 때문에 실패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더 큰 것 같다. 기업가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큰 꿈이 있으면, 실패해도 다시 돌아가서 또 해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