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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이야기

라면을 우동으로- 그런 놀라운 솜씨를???

by 고향사람 2011. 10. 31.

보름 전 열아홉 생일을 보낸 우리 집 헬퍼 ‘아바’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웃을 때 마다 보조개가 들어가는 아주 귀여운 아가씨랍니다.

민다나오에서도 가장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소읍 발렌시아쪽 산골에서

나고 자란 터라 수줍음???도 굉장합니다.

 

발렌시아쪽 집에서 데리고 있던 터라 까가얀데오로로 내려 오면서 함께 오게 됐는데

그동안 제수씨가 가르쳐준 한국음식을 곧잘 해 줘 우리에겐 보물같은 헬퍼입니다.

그런데 어저께는 영 아니었습니다.

 

전날 까가얀데오로에서 여덟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수리가오에 갔다가

오밤중에 들어 온 터라 낮잠을 좀 자게 됐습니다.

일요일인데다가 아우도 없어 아침 수저를 놓자마자 잠이 들었나 봅니다.

잠결에도 배꼽시계는 잘 움직였는지-

배가 출출하다 싶어 깨어보니 열두시가 넘어 있었습니다.

 

뭔가 먹어야 겠다는 생각으로 1층 식당에 내려가니 솜씨 좋은 헬퍼는

벌써 점심을 차려 놓고 있었습니다.

‘어이구 이쁜것 어쩜 내 마음을 미리 알았을까’

하면서 식탁에 앉았더니 일본식 그릇에 우동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낮잠 잔 뒤 먹는 우동이야 말로 죽음?입니다. 그 시원한 국물하고 말입니다.

 

내 마음을 이정도로 읽고 있었다니- 정말 감격했습니다.

한 젓가락을 떠 입으로 가져가려다 보니 국물색이 좀 이상했습니다.

잠이 덜 깬 눈으로 봐서인가 싶어 눈을 비비다 생각하니

내가 우동을 사다 놓은 기억이 없는 겁니다.

 

혹시나 싶어 물어 봤습니다.

-이거 뭐니

라면이랍니다.

근데 면 가락이 왜 이런데.

 

점심 때가 다 돼 라면을 끊여 놓고 방에 올라 와 보니 내가 자고 있더라는 겁니다.

몇 번 불렀는데 깨지 않아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노라고-

에언컨 돌아가는 소리 때문에 내가 잘 못 들었나 봅니다.

-큰 소리로 깨웠어야지 했더니 화를 낼까봐 그러지도 못했다는 겁니다.

 

내 기억으로는 피노이들한테 화 한번 낸 적 없건만-

역시 촌에서 온 굉장히??? 순진한 아가씨라서 많이 틀린가 봅니다.

딱 한 개 남은 한국라면을 우동으로 만들어 놓은 이 기막힌 솜씨에-

난 퉁퉁 붉은 라면, 아니 우동을 먹으면서도 ‘오냐 오냐 고맙다’를 연발했습니다.

그게 어떤 라면인데- 아우가 끓여 먹으려고 하던 것을 빼앗아 놓고

내 혼자 먹을 날만 기다리고 있던 건데-

 

맛없는 우동?을 먹은 탓인지 아직도 속이 부글거립니다.

아마 아우까지 이 사실을 알게되면 난 비행기서 뛰어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