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이야기
스물세가지의 선물
고향사람
2010. 1. 7. 09:08
필리핀에서 살면서 받은 선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그건 어떤 것일까요.
-나는 친구한테 받은 한국 책인데.
얼마 전 아들놈에게 소포가 왔는데 큼직한 박스를 뜯어보니
온갖 잡동사니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신년도 다이어리를 비롯해 양말 노트 연필 컵 달력 필통 초컬릿 --
여기에다 젓가락과 수면용 안대까지 포함이 돼 있었습니다.
하나하나 세어보니 23이라는 숫자에서 멈췄습니다.
스물세가지의 선물이 들어 있었던 겁니다.
아들놈 생일 숫자와 같은 물건이 소포로 온 겁니다.
-물론 여친한데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선물을 받은 아들놈이나 마눌과 나 역시 가슴이 짠했습니다.
작년에 대형 교통사고를 쳤던 아들놈이 그 이후부터는 연애도 접고
나쁜 습관도 다 버리겠다고 결심을 굳힌 뒤 날아 온 선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엄마 나 그 여자 애 정말 좋아했었는데.
새로운 결심이 얼마나 갈지는 모르지만
스물세가지의 선물을 보는 순간 많이 무너져 내린 것도 같습니다.
이제부터는 결혼을 전제로한 건전한 교제만 하겠다는 아들놈의
결심을 지켜보며 너무 일찍 철이 드는 게 아닌지 오히려 걱정이 앞섭니다.
그나저나 나도 죽기 전에 내 생일에 내 나이 만큼의 개수를 채운
선물 박스를 한 번 받아 볼 수나 있을 런지.
마눌 얼굴을 슬쩍 보니 언감생심이고, 아들놈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아
일찌감치 포기하고 말았습니다만-
-님은 시방 몇 가지 선물을 받을 만큼의 경륜이 쌓였는지요^^